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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데슬]JUSTICE! <2> 본문
JUSTCE! <1> : http://haneulrocket.tistory.com/2
팬텀은 애꿎은 머리를 헤집었다. 결 좋은 금발이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거렸다. 저택에서 수십 개의 금고가 나왔다고 했을 때만 해도 하루면 숨겨진 보물섬이 튀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수사 착수 사흘째, 모든 금고를 뜯어내고 저택 구석구석 금속 탐지기가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플라스틱 보석 한 조각조차 발견되었단 보고가 없었다.
오늘 아침 걸려온 전화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성과가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판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지만 초반부터 난항을 겪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아아.”
티끌만한 실마리라도 있다면 쫓기라도 할 텐데, 출발선상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꼴이었다. 팬텀은 애꿎은 사건파일만 펄럭였다. 두꺼운 종이 뭉치가 파라라락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범인의 행적이 저택 주변을 벗어나지 않아 확신을 가지고 저택만을 파헤치고 있었지만 이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지끈 울려왔다.
“팀장님.”
똑똑, 얇은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이마를 짚은 채 시선을 든 팬텀을 같은 팀의 시나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식사라도 좀 하고 오세요. 몇 번씩 본 거 뒤적거려봤자 뭐해요.”
“…피해자 증언 확보 다 했어?”
“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녹음했어요.”
“사건 얘기할 때 힘들어 하는 기색은 없었고? 너무 심하게 추궁한 거 아니지?”
“그거 막으려고 저 보내신 거잖아요. 옆에 상담사 하나 의사 하나 끼고 잘 했어요. 녹음으로 증거가 되냐고, 영상 찍어 가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애초에 비교적 충격이 적은 분들만 불렀기도 하고.”
“잘 했네. 그쪽은 믿고 맡길게. 내가 딱히 안 들어봐도 되지?”
“네에. 그런데요.”
시나몬이 허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유치한 동작인데 이제 막 학생 태를 벗은 소녀가 하니 느낌이 색달랐다.
“피해자 증언 완벽, 피해자 몸 안에 남은 DNA 증거까지 완벽하니 형량은 200년도 거뜬하고, 이제 현장에서 숨겨진 재산 찾아 낼 때 까지 우리 할 일 없어요. 그러니까 나가서 뭐라도 좀 먹고, 산책도 좀 하고 오세요. 네? 새벽같이 출근하셔서 지금 몇 시간째예요?”
“글쎄…….”
조만간 할 일이 무더기로 쏟아질지도.
팬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나몬은 자 빨리, 빨리. 하고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아닌 척 해도 여성에게 약하니 이러면 하자는 대로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팬텀은 “어이구, 쫓아내네. 쫓아내.” 하면서 의자에 걸린 자켓을 챙겨 들었다.
시나몬이 양손으로 팬텀의 등을 밀었다. 얼른 가세요! 천천히 돌아오세요! 팬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겉옷에 팔을 넣었다. 손을 흔들 때쯤엔 벌써 문이 닫혀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삭막한 회색 문을 통과하니 칙칙하게 궁상떨던 사람을 비웃듯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검찰청 왼쪽으로 오늘도 황성이 평화롭게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 머무는 신성한 궁전이 팬텀에게는 그저 악덕 고용주의 집으로 보일 뿐이었다. 공무원엔 관심이 없다는 그에게 검사증을 쥐어주고 검찰청으로 뻥뻥 밀어 넣은 누군가의 미소가 푸른 하늘에 겹쳐 보였다. 이래저래 십 년 가까이 검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제 적성에 안 맞는단 불평도 못 할 처지다.
팬텀은 중앙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어폰을 꼈다. 수신인은 크리스틴. 단조로운 컬러링이 지나가고 깊은 한숨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제발 마지막 휴일이라고 하지 말아줘요.」
“전화 받을 때부터 예상했잖아.”
으으……. 그녀는 짧은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일단 내가 시작은 해볼게. 리스트만 대충 추려줘. 내일 오전까지 저택에서 아무것도 발견 안 되면,”
「…….」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시작해야지.”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진짜.」
그녀도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는지 ‘저택에서 꼭 나올 거예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로 표정이 보일 만큼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뿐.
「우선 한 시간 내로 작성해 보낼게요.」
“응, 고마워. 그리고 남은 휴일 꼭 알차게 쓰고 오고.”
「집에만 있으려고 했는데 영화관이라도 가야겠어요.」
영화 좋지, 중얼거리며 팬텀은 앞에서 와다다 달려오는 남자 아이를 피했다. 뒤에선 아이의 어머니가 ‘어휴, 뛰지 말라니까!’하며 아이를 쫓아갔다. 건물이 밀집된 곳을 벗어나 광장으로 이어지는 공원 단지 쪽으로 나오자 거리의 인구 밀도가 확 늘었다. 물론 그 활기참 또한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 우울증 걸릴 것 같아.”
그러자 「걸려도 이번 일 끝나고 걸려요.」 하는 일갈이 돌아왔다. 눈물이 나는 동료애였다. 팬텀은 거리에 조각된 신수 상 앞에 멈춰 섰다.
“신수님께 기도합시다, 자매님. 제국의 정의를 지키는 가련한 법조인들을 위해 범인의 집에서 오늘 안에 잭팟이 터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기도 이뤄지면 저 앞으로 십일조 할지도.」
“그럼 난 매주 신전 갈래.”
물론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빈말이었다. 둘 다.
「그래요. 이 기회에 독실한 신자 한 번 되어 봤으면 좋겠네요. 내일 봐요.」
“응. 굳 럭.”
통화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광장 중앙 분수대였다. 팬텀은 시간을 확인하고 식당가로 가는 대신 바로 앞의 핫도그 트럭 앞으로 갔다. 혼자 나왔는데 화려하게 식사를 할 마음도 없거니와, 크리스틴이 리스트를 보낸다는 한 시간 안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파란 파라솔 안으로 들어서자 푸근하게 인사하는 주인과 투박한 글씨로 적힌 메뉴판이 보였다.
“스파이시 칠리 네 개 포장이요. 머스타드 소스는 조금만. 네 개 다 치즈 세 장씩 추가해 주십시오.”
총각, 빵 값보다 치즈 값이 더 많이 나오겠네. 트럭 주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팬텀은 식사 대신인데 아무렴 취향껏 먹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금세 나온 핫도그 봉지를 받아 들고 다시 분수 광장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좋아 광장에는 그처럼 거리 음식을 먹거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팬텀은 종이봉투 안의 핫도그를 하나 꺼내 포장을 벗겼다. 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촉촉한 빵과 소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센스 있게 넣어준 종이 냅킨으로 핫도그를 집어 들고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자산이 저택 외부에 숨겨져 있다 생각하면 조사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진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전 세계 은행망과 암시장을 통째로 들어낼 각오를 해야 한다. 문제는 그 두 조직이 황실이나 원로원 다음으로 내부 정보 제공에 인색하다는 데 있다. 모르긴 해도 꽤나 진득한 소모전이 될 것이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격전을 시작하려면 팀의 리더인 그가 리스트를 세분화해서 팀원들의 각자 조사할 몫으로 나눠 둬야 한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을 어린 팀원 둘의 표정이 상상이 갔다. 방금 전 까지도 저택에서 반드시 뭐가 나올 거라 굳게 믿는 얼굴이었다.
사회는 이렇게 쓴 것이란다, 세상에 쉬운 일 없어요. 까마득한 사회인 선배는 분수대 주변을 걸으며 두터운 치즈가 죽죽 늘어나는 핫도그를 요령껏 끊어 먹었다.
칙칙했던 기분이 수줍게 어깨를 두드리며 번호를 묻고 간 아가씨 두 명에 의해 한결 나아졌다. 물론 둘 다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당분간 뭘 해볼 여유도 없거니와 둘 다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모는 둘째 치고, 두 명 모두 최근 제도에서 유행한다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톡톡, 그 때 옆에서 다가온 손이 그를 불렀다. 팬텀은 참 죄 많은 얼굴이야, 하며 돌아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검사님… 맞으십니까?”
이렇게 찰랑거리는 스트레이트 헤어……, 의 주인은 안타깝게도 남자였다. 아니, 안타깝다는 말은 취소. 세기의 팜므파탈 스파이였다.
“마타 하리 경?”
“…제 이름 아시지 않습니까.”
데몬은 조금 타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이네요. 지금 막 긴 생머리의 미인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는 특무대 제복이 아닌 밤색 니트에 블랙 진을 입은 평범한 차림이었고, 긴 머리도 하나로 올려 묶여져 있었다. 다리는 다 낫지 않았는지 여전히 목발과 함께였다. 차가운 제복 속에 담겨 있을 때완 느낌이 사뭇 달랐지만 특유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저도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 했었습니다.”
“아, 혹시 뭐 생각나신 게 있습니까?”
“네.”
어, 설마. 팬텀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범인의 침실 옆 인질들을 모아 놨던 장소에 바닥이 열릴 만한 틈이 있었습니다. 그 곳도 조사해 보셨습니까?”
“아.”
푸른 눈이 다시 곱게 접히고 얼굴에 맥 빠진 웃음이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안에 금고가 하나 들어 있긴 했는데 텅 비어있었습니다. 저택에서 발견 된 대부분의 금고가 그런 상태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찾으시는 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겁니까?”
“네. 어찌나 잘 숨겨둔 건지.”
덕분에 기약 없는 야근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이번 사건이 끝나면 황실에 국어사전 두께의 탄원서를 넣어서라도 일주일 이상의 휴가를 얻어낼 것이다. 그리고 기필코 떠날 거다. 황성이 보이지 않는 머나먼 해외로. 그 전에 재판이 무사히 끝나야 마음 편히 간다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저택 안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운송 수단이 황명으로 통제 되고 있으니 외부로 유출되었다 하더라도 움직이지 못하고 어딘가 묶여 있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범위가 어마어마하긴 합니다만.”
그리고 너저분한 진흙탕 싸움이 예상되긴 합니다만, 팬텀은 그 말을 삼키고 입가의 소스를 닦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그래도 찾아낼 겁니다. 걱정 마세요.”
“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 그런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시지 않고요.”
데몬의 깜빡거리는 눈에 팬텀이, 아니 그의 한 쪽 손에 들린 핫도그가 담겨 있다. 팬텀이 아아, 하고 민망한 웃음을 띄웠다.
“금방 다시 일하러 가야 돼서 배만 채우는 겁니다.”
핸드폰에 충전기 꽂는 것 같은 느낌이죠. 농담조로 덧붙인 말에 데몬이 저런, 하고 눈썹 끝을 내렸다.
“바쁘신데 제가 괜히 붙잡아둔 겁니까?”
“아뇨, 아닙니다. 그렇게 촉박하진 않아요. 그래도 슬슬… 돌아가 보긴 해야겠네요. 한 입 드시겠어요?”
그가 입이 닿지 않은 쪽을 내밀었다. 데몬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검사님 식사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배터리 세 통 더 있습니다.”
두툼하게 배가 나온 핫도그 봉지가 부스럭 흔들렸다.
“검찰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리 제가 막나가도 그 삭막한 정문을 핫도그를 우물거리며 통과할 순 없어서요. 수사에 협조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전보다 풀린 미소가 데몬의 얼굴에 퍼졌다. 내밀어진 핫도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입을 벌려 크게 베어 물었다. 그가 먹고 반 뼘이 안 되게 남은 마지막 조각을 팬텀이 입에 쏙 넣었다.
입 안의 음식물을 다 넘긴 데몬이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 주변을 핥았다. 입가를 가린 손가락 사이로 붉은 혀가 언듯 보였다.
“……어.”
또다. 팬텀은 또 한 번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본인이 의식하고 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젖은 입술을 닦는 동안만 해도 세 사람 정도가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낭창낭창한 중성적인 외모는 아니지만 그를 평가할 때 미인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에게선 늘 서늘한 분위기가 풍겼다. 표정이 많지 않은 무던한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행동은 보는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슬아슬한 천으로 한 겹 가려져 실루엣만 보고 침을 삼킬 때의 오싹함과 닮아있다.
주변 사람과 덩달아 잠시 넋을 놓은 팬텀도 “치즈가 많네요.”라는 말에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이런 걸 색기라고 하는 건가.’
나름 산전수전, 겪을 꼴 못 겪을 꼴 다 접해본 팬텀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타 하리, 먼 옛날 치명적인 매력으로 전쟁터를 종횡무진하며 각 나라의 수장들을 휘어잡았다는 세기의 스파이의 외모는 사진 상으론 명성에 비해 평범한 편이었다. 사진이 아닌 그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다면 분명 지금과 같은 묘한 서늘함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장님.”
“네.”
데몬이 대답했다. 의식하고 보니 눈꼬리가 올라가 있는 상이었다. 군인인데 비해 피부도 흰 편이고.
“제가 미인이라는 얘기는 했죠?”
“…네.”
“매력적이라는 얘기도 했습니까?”
“지금 하셨네요.”
데몬의 미소는 더 이상 그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좀 더 담겨 있었다.
“애인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질문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이내 곧 다시 구름이 졌다.
“아아, 바쁜 와중만 아니면 작업 거는데.”
골문은 열려 있고 골키퍼 역시 없지만 현실이라는 수비 장벽이 수십 겹이다. 절망하는 공격수를 깨운 건 전에 없던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바쁜 와중엔 왜 작업을 못 겁니까?”
“예?”
팬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몬을 쳐다봤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올려 묶은 머리가 함께 미끄러졌다.
“전 공사가 완벽한 사람이 취향입니다만.”
“하…….”
팬텀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어깨를 두드려 번호를 묻는 것도 아니고, 멀찍이 떨어져 나뭇가지로 쿡쿡 찌르는 수준의 대시였다. 오고 싶으면 오던가, 아니면 말고. 그러나 그 어떤 행동보다 그를 동하게 했다. 그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한기가 더해졌다.
“도전해 보겠습니다. 각오하십시오.”
데몬이 대답했다. “기대하겠습니다.” 서늘한 미소에 약간의 온기가 더해진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