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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데몬]물의 기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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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데몬]물의 기억

하늘로켓 2017. 2. 8. 20:01



 같은 군단장의 손에 가족을 잃은 데몬은 범인을 시체의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참하게 살해했다. 엄격히 금지된 군단장간의 전투에,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까지 한 그에게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 당연했으나 검은 마법사는 침묵으로 사건을 덮었다. 가족을 잃은 분노를 용인해 주어서인가 그간의 공로를 감안한 특혜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피로 물든 현장에 있던 일부 군단장만이 알 수 있었고, 그들은 그 사실을 외부에 발설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욕실과 연결된 집무실 바닥이 흥건해지도록 물이 그치지 않았다. 넘친 물이 데몬의 입과 코를 막을 때쯤에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였다. 평소와 같이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한 데몬의 한 쪽 손목은 깊게 베어져 욕조를 넘는 물을 붉게 물들였고, 바닥을 향해 힘없이 늘어진 다른 손엔 날선 단도가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물의 기억
Written by. SKYROCKET



 “어, 깨어났다.”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던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건너편의 검은 마법사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노골적인 시선에도 답하지 않았다.

 “깨어났다니까?”
 “…….”
 “안 가봐?”

 그제야 성의 없이 고개가 끄덕였다. 소녀는 흥, 볼을 부풀렸다. 그녀의 밝은 금발과 녹색 드레스 위에는 군데군데 굵은 핏방울이 얼룩져 있었다. 오랜만에 큰 마법을 사용해 씻을 정신도 없이 기진맥진한 사이 말라붙어 딱딱해진 옷감에서 검은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초월자의 힘을 써 치료한 상대의 상처도 깊었지만, 그를 안고 달려와 살려 내라 제 멱살을 잡은 이가 다른 이의 피로 더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몬이 자살을 하기 전, 아카이럼을 난도질하며 묻은 피였다.

 하루 전 데몬은 메마른 목소리로 오열하며 이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시체를 연신 찔렀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머리의 앞뒤를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핏덩어리는 이미 숨이 끊긴지 오래였다. 가장 이성적이던 군단장은 가족을 잃고 감정의 나락까지 무너져 내렸다. 피에 젖은 손에서 무기가 미끄러지자 맨손으로 시체를 헤집었다. 이성을 놓은 머리는 시체의 갈비뼈에 제 팔이 죽죽 긁히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오르카는 그만 볼래, 잔혹한 군단장마저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린 장면이었다.
 살육의 밤을 끝낸 것은 검은 마법사였다. 그는 성한 곳이 없는 양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피와 거무죽죽한 살점을 뒤집어 쓴 몸을 품안으로 당겼다. 헝클어진 채 말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다정한 손길이 파고들었다.

 “그만하렴. 이미 죽었단다.”

 커다란 손은 데몬의 등을 달래듯 두드렸다. 아, 아으… 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발작하듯 떨리는 몸을 검은 마법사는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 단단히 안았다.
 다 끝났어, 이제 그만…… 착하지.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은 목소리가 도닥임과 함께 이성을 잃은 데몬을 달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그의 어깨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검은 마법사의 어깨에 묻힌 피투성이 얼굴에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정한 손길과 음성은 데몬이 지쳐 쓰러질 때 까지 계속되었다. 주저앉아있는 데몬과 높이를 맞추기 위해 꿇은 무릎 아래에서부터 그와 닿은 곳까지 온 몸이 더럽혀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검은 마법사의 총애가 단지 데몬의 독보적인 공로에서 기인한 것뿐만이 아님을 모르는 군단장은 없었다. 그의 감정이 군신관계를 넘어섰다는 것 역시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봤다면 눈치 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불퉁한 침묵을 깨고 어렵게 들려온 검은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생명의 초월자는 그의 표정을 보고 되묻는 것을 포기했다.
 공공연한 비밀 속 불행한 하나의 예외는 무뚝뚝한 총애의 당사자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답다며 웃어넘기곤 했던 어리석은 기만의 시간은 무참히 부서졌다. 무수히 금이 가 어두운 바닥이 드러난 자리는 불타 사라진 폐허만큼이나 황량했다.



.

.

.



 손목에서 시작해 팔 중앙까지 깊게 단 한 번의 칼질로 베어냈다. 삶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깨끗하게 잘려 나간 상흔이었다.
 되살리지 못할 상처를 다른 초월자의 힘까지 빌려 필사적으로 고쳐놓은 데 반해 검은 마법사는 이후 한 번도 데몬을 찾아가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에게 부러 말을 꺼내는 어리석은 사람 또한 없었다. 무관심을 덧그린 가면은 얇기 그지없어 시린 분노의 끝을 겨우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데몬이 눈을 뜬 지 사흘 째, 검은 마법사의 반쯤 뜨인 눈꺼풀 속 짙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단 한 숟가락이라도 드셔 달라 계속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애써 덮어 둔 가면이 서서히 벗겨졌다. 검은 마법사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시종이 불쌍할 정도로 몸을 떨었다. 다행히 시선은 곧 거둬지고 계속 말하란 손짓에 더듬거리며 설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초월자의 힘으로 생명을 붙잡아 놓자 타고난 마족의 생존 본능은 빠르게 몸의 상처를 치료해나갔다. 데몬은 상처가 나은 하루 안에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왔을 뿐,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허공을 보는 눈은 생기가 없었다. 살아났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몰골이었다. 깨어난 이후 데몬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뜨면 초점 없는 눈으로 몇 시간이고 빈 천장을 바라보고, 그 자세 그대로 죽은 듯 잠들었다. 저를 부르는 소리도, 흔들어 깨우는 손짓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힘없는 팔은 억지로 이불 밖으로 당겨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 수 있었지만 식사는 아니었다. 그가 깨어난 뒤 매 끼니 꾸준히 영양가 있는 식사가 나왔지만 데몬의 입에 들어간 음식은 없었다. 수액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설명을 마친 시종이 검은 마법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싸늘한 적막 속엔 깊은 한기가 돌았다. 이마를 짚은 손 사이로 눈이 느리게 감겼다. 고요한 적막 사이로 주군, 주인을 잃은 환청이 말을 걸었다. 사라진 모습과 함께.
 가족을 잃고 복수한 하루, 자살을 기도하고 사경을 헤맨 이틀, 깨어난 뒤 사흘. 총 엿새였다. 아무리 생명력이 끈질긴 마족이라도 큰 상처를 입고 일주일 가까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종들이 벌벌 떨면서도 검은 마법사의 앞에 나섰을 테고, 전쟁터를 전전하며 다양한 위기를 겪어본 데몬은 더욱 제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움직임이 가능해 진 뒤로 위험할 정도로 식사를 거부했다면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해로 죽는 것을 실패한 뒤 날붙이 하나 없는 방에서 살벌한 감시를 받는 데몬의 다음 수는,

 “굶어 죽으려 하는 건가.”
 “…….”

 차가운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벽에 부딪혀 울리는 목소리조차 살벌했다. 검은 마법사가 가까스로 붙잡은 생명을 데몬은 또 다시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출혈사에 아사(餓死)라. 고통스러운 방법만 골라 시도하는군.”

 동맥을 그어 죽을 때까지 피를 내는 방법이나, 생명 유지 기능이 사라지도록 굶는 방법이나 숨이 끊어질 때 까지 괴로운 방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데몬은 그렇게 해서라도 또 다시 삶을 버리려 하고 있다. 이승에 대한 미련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닮은 웃음이 비참한 꼴을 비웃듯 새어나왔다.

 한 때 검은 마법사 자신이 그의 삶의 일부라, 그가 의미를 갖는 존재로 남아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빈틈없이 가득 차 있던 것은 가족뿐이었다. 모두가 데몬이 짊어진 짐이라 여긴 힘없는 두 사람은 그에게 망망대해 속에 단 한 곳 기대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섬이었다. 공기를 얻던 곳이 무너져 내리자 데몬은 익사 대신 남은 힘을 짜내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어떤 군단장도, 심지어 가해자인 아카이럼 조차 데몬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크게 분노는 하겠으나 군단장으로써의 선은 지킬 것이다, 그보다 월등히 강한 데몬에게 도를 넘은 도발을 하는 용기를 준 것이 그 부분이었을 것이다. 착각의 대가는 고스란히 돌아왔다. 아카이럼에게도, 그리고 어렴풋이 눈치를 챘음에도 군단장간의 일이라 방관한 검은 마법사에게도.
 주종과 군신을 넘어 간신히 손끝에 잡힐듯하던 관계가 순식간에 버석한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다정하게 달래주며 가족을 잃은 자리를 대신할 기회는 없었다. 데몬은 자신을 둘러싼 창을 모두 닫은 채 서서히 가라앉았다.

 긴 손가락 사이에 언뜻 비치는 얼굴에서 표정이 점차 사라져갔다. 숨막히는 정적이 지나가고 침묵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파문이 일었다.

 “또 한 번 식사를 거부한다면.”

 하얗게 일어난 물결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냉기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착각이 일었다.
 검은 마법사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린 듯한 미소였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감추지 못한 쓴 상처가 시리게 피어올라 눈 위로 덧그려졌다.

 “병사를 불러 몸을 구속하고 억지로 입을 벌려서라도 쑤셔 넣어라.”

 침몰하는 데몬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을 것이다.





 명령을 내린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사단이 났다. 데몬이 다시 한 번 자살을 기도했다는 보고를 들은 검은 마법사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를 찢어 죽일듯 흉흉했다. 거칠게 옥좌를 밀치고 일어난 검은 마법사의 발걸음에 분노와 조급함이 실려 있었다. 검은 마법사의 명령대로 식사와 함께 불려온 병사들이 데몬의 팔다리를 잡고 앉혀 억지로 입을 벌리자, 그는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고 접시를 깨 조각으로 손목을 그었다고 했다. 다행히 주변이 빠르게 움직여 상처는 미미한 데 그칠 수 있었다. 일개 병사들 몇의 힘으로 군단장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데몬의 영양실조였다.

 그가 있는 침실에선 약 냄새가 짙게 났다. 시트에 묻은 적지 않은 핏자국과 다 치우지 못한 몸싸움의 흔적 너머에 데몬이 있었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해쓱한 뺨, 하얗게 일어난 입술, 이리저리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어디에도 총명한 군단장의 모습은 없었다.

 “데몬.”

 검은 마법사가 그를 불렀다. 검은 마법사를 발견한 병사들이 붙잡고 있던 데몬의 팔다리를 놓고 물러났다. 뒤로 한데 모아져있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데몬.”
 “…….”
 “데몬.”
 “…….”

 세 번째 부름 만에 방 안에 있는 인원의 시선이 몰린 곳으로 데몬도 천천히 건조한 시선을 돌렸다. 느리게 눈을 몇 번 깜빡인 뒤에야 눈에 초점이 간신히 맺혔다. 시야에 검은 마법사가 들어오자 데몬이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였다.

 “왜…….”

 겨울날 창가에 둔 성냥불보다 작은 목소리였다.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아 검은 마법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흐린 눈동자에 비친 모습이 탁했다. 엉망으로 부스스한 몰골 앞에 검은 마법사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왜 저를 살리셨습니까.”
 “…….”

 검은 마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삶을 여러 차례 끊어내려 한 손목에는 두텁게 붕대가 둘러있고, 날카롭게 깨진 조각을 쥔 반대쪽 손도 마찬가지였다. 긴 로브 속 감춰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것인 줄 알았더라면 듣지 않았을 거다.”

 화가 묻은 목소리가 울린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소독약 냄새를 머금은 공기가 꿉꿉하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방 안을 날카로운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데몬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느리게 뜰 뿐이었다. 잠시나마 한 곳으로 모였던 눈빛이 다시 흐리게 흩어졌다. 앞니가 입술을 파고드는 으득 소리가 선명하게 나고, 검은 마법사의 입술에 핏기가 어렸다.
 검은 마법사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손찌검을 할 듯 사나운 손짓이었지만 방어도, 놀람도 없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벽에서 나온 검은 사슬이 데몬의 양 손목을 잡아 그의 머리 위 벽으로 당겼다.

 텅―.

 불거진 손등 뼈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손목 위로 동그랗게 술식이 그려졌다.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데몬의 손목을 벽에 단단히 고정했다. 간단한 마법이라도 시전자가 초월자라면 본래 이상의 위력을 보여 쇠약해진 마족 정도는 무리 없이 구속할 수 있었다. 데몬이 조금 커진 눈으로 검은 마법사를 바라봤지만 검은 마법사는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마법사의 시선이 데몬 옆의 병사에게 옮겨졌다. 눈이 마주친 병사가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세웠다.

 “침대를 제외한 방 안의 모든 물건을 치우고 그 무엇도 저 손에 들려주지 마라. 식사를 거부하더라도 억지로 쑤셔 넣도록. 만약 토해낸다면 같은 양의 음식을 다시 먹여라.”
 “…주,”

 데몬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묶인 손목이 방해했다. 쉰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기 전에 검은 마법사는 몸을 돌려 방 밖으로 향했다.

 “철저히 지키도록.”

 무거운 목소리로 남긴 마지막 명령을 끝으로 검은 마법사는 다시 복도를 가로질렀다.
 데몬의 질문에 그는 답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또한 그가 몇 번이고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왜 저를 살렸냐 묻는 사람에게 전하기엔 너무나 비참한 말일 뿐이었다.
 간절했던 한 마디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가시가 되어 목 안을 따갑게 짓눌렀다.



.

.

.



 데몬의 식사 시간은 하루에 한 차례에 그쳤다. 하루에 한 끼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정도는 된다. 헛구역질을 하는 입안에 억지로 식사를 밀어 넣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부족한 식사를 보충하기 위해 야윈 팔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사라지는 날이 없었다.
 묽은 식사가 들어오자 표정이 없던 데몬의 눈가가 작게 움직였다. 태엽이 망가진 인형 같은 무표정에 드물게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가벼운 거식증 증상까지 찾아온 그에겐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괴로운 일과였다. 데몬의 양손은 여전히 침대 헤드 위에 묶여 있고,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두 다리는 침대와 연결된 벨트로 묶여 꼼짝 할 수 없게 했다.
 한 병사가 데몬의 양 얼굴을 눌러 입을 벌려내면 다른 시종이 입안에 재빨리 음식을 넣었다. 그러면 입을 벌리던 손이 코와 입을 틀어막아 숨이 막혀 억지로 삼키게끔 만들었다. 같은 동작이 두 번, 세 번 반복될수록 호흡이 모자란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눈가가 젖어들었다.

 “……우욱, 욱―……!”

 간신히 다섯 숟갈을 넘겼을 때 어깨가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데몬은 토기를 참아보려 입안을 조이며 숨을 참았다. 묶인 몸을 비틀며 구역질을 내리누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왔다. 데몬은 먹은 죽을 그대로 토해냈다. 옆에 있던 시종이 이제 익숙하다는 듯 플라스틱 통을 입 앞에 댔다. 눈물이 맺혀 흐릿한 시야로 그가 오늘 먹어야 하는 접시에 새로 한 국자가 추가되는 것이 보였다. 토해낸다면 같은 양을 다시 먹이라는 명령의 충실한 수행이었다. 어지러움이 찾아와 눈을 찌푸리자 토하는 새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안을 헹궈낼 새도 없이 다시 얼굴이 잡혔다. 잔뜩 일그러진 채 들어올려진 젖은 시야의 끝에 차가운 표정의 검은 마법사가 보였다. 고문과 비슷한 식사를 이어가며 얼굴 곳곳이 시커멓게 죽은 데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며칠 사이 그의 얼굴도 상당히 상해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에선 이전보다 더 벼려진 날카로움이 보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며칠만의 방문이었다. 데몬의 눈은 여전히 흐렸지만 토기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실핏줄이 인 눈이 검은 마법사를 향했다.

 왜 나를 죽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

 붉게 물든 데몬의 눈이 말했다. 검은 마법사는 짙어진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시선의 대치는 길지 않았다. 초월자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병사가 다시 우악스럽게 입을 열게 했다. 굴욕적인 식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려는 때였다.

 “그만.”

 검은 마법사가 병사들을 만류했다. 데몬의 앞으로 다가온 검은 마법사는 작게 입을 벌리고 잇새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이 예상한 초월자를 향한 불손한 눈빛에 대한 처분은 없었다. 얼굴로 다가온 손은 긴 로브로 된 소매를 끌어 당겨 눈물 젖은 뺨과 더러워진 입가를 닦았다. 얼굴을 지저분하게 하는 것은 닦아냈지만 울음과 강제적인 식사로 아직 울긋불긋한 얼굴 앞에 검은 마법사의 두 번째 한숨이 퍼졌다.

 “스스로 먹겠다고 하면 구속을 풀어주겠다.”

 협박이 기저에 깔린 제안이었지만 말투는 마치 검은 마법사가 데몬을 붙잡고 부탁을 하는 것처럼 간절했다. 검은 마법사의 엄지손가락이 유난히 손자국이 짙게 남은 왼쪽 뺨을 위로하듯 문질렀다. 괴로운 식사에 시달리던 데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마법사는 주변을 물리고 침대 옆 차려진 작은 테이블 앞에 섰다.
 데몬은 약속한 대로 스스로 식기를 들었다. 최강의 군단장으로써 무기를 들었던 손은 앙상하게 메말라 간신히 숟가락을 지탱했다. 묽은 죽이 한 숟가락씩 입 안으로 들어갔다. 1분에 한두 숟갈을 떠먹는 느린 식사였지만 검은 마법사는 가만히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데몬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 마른 뺨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목울대가 오르내리는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 반대로 데몬은 먹어야 하는 접시에만 시선을 내렸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식사 중간, 억지로 먹여질 때보다는 덜하지만 조금씩 구역질이 있었다. 데몬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다 결국 침대 맡에 둔 플라스틱 통을 급하게 들어 올리고 먹은 것을 쏟아냈다. 그가 모르는 사이 검은 마법사의 손이 그를 향해 뻗어지다 주춤하고 다시 거둬졌다.
 속에 든 것을 토해내기를 두어 번, 떨리는 손 위에 얹어진 숟가락이 위로 들려지지 않은 채 음식물 가장자리를 따라 맴돌았다.

 “저.”

 데몬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전처럼 갈라진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물기가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더, 못 먹겠습니다. 여기까지만…….”

 그가 애처롭게 위를 올려다봤다.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토기 때문에 젖은 눈인 것을 알아도 검은 마법사의 입에선 세 번째, 체념의 한숨이 나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방에 오기 전 한 예상에 있던 상황이었고, 자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마’라 가정한 감정을 가졌다.
 몇 번이고 원망했지만 결국은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관계에서 검은 마법사는 결국 철저한 약자였다. 더욱 야윈 데몬을 마주하자 오기로 붙잡고 있던 원망은 사라지고 강압적이었던 명령에 대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데몬의 머리 위에 큰 손이 와 닿았다. 그의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그만큼 먹었으면 됐다. 잘했다.”

 푸석한 머리카락이 하얀 손가락에 엉겼다.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데몬의 양 손이 마법에 의해 가슴 앞으로 모였다. 새로 생긴 술식은 침대 위에 두 팔을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양 엄지손가락을 붙여 묶어 둔 가벼운 구속이었다. 검은 마법사는 데몬이 식사한 접시를 직접 들고 방을 나섰다. 데몬은 벽에 몸을 기대앉았다. 손이 묶여있지만 팔이 위로 들려있던 며칠간 보다 훨씬 자세가 편했다.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데몬의 얼굴 위로 검은 마법사가 쓰다듬은 모양이 남아있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잠깐 눈을 떴을 때 보인, 평소와 같이 흐린 눈이 아니라 흔들림 가득한 눈빛은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졌다.





 검은 마법사의 구속이 약해 진 것을 안 병사들이 데몬이 또 위험한 행동을 할까 하루 종일 경계를 바짝 세웠지만 데몬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검은 마법사는 다음 날 식사 시간에도 데몬의 방에 찾아왔다. 이번에는 식사를 시작하기 전 스스로 먹겠냐고 물었다.

 “…네.”

 힘없는 작은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법이 사라졌다. 그 전날과 같은 장면이 방 안에 재연됐다. 데몬은 느리게 숟가락을 움직였고 검은 마법사는 그 앞에 서서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데몬은 억지로 구역질을 누르는 대신 호흡을 고르며 아주 천천히 음식을 넘겼다. 욱욱거리며 속을 쥐어짜 망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시간을 사는 초월자는 얼마든지 인내심 있게 기다릴 용의가 있었다.
 데몬이 새로 한술을 떴다. 숟가락에 반 정도 담긴 묽은 우유죽이 접시 위에 두어 방울을 떨어뜨리며 들어 올려졌다.

 “군의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검은 마법사는 답지 않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가 데몬이 제게 말을 건 것과 제 망상에서 나온 환청 중 어느 것이 가능성 높은가를 재고 있을 때 데몬이 고개를 들어 검은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흐린 눈꺼풀이 되묻듯 두어 번 깜빡였다.

 “군, 단장의 자리에 둘이나 공석이 생겨 아직 정리가 필요하지만 외부 전투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당황이 묻어 첫마디가 조금 흔들렸다. 뒤늦게 평이한 어조를 되찾았지만 민망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뱉은 말을 되짚어 보자 어쩐지 어렵게 질문을 꺼낸 그를 타박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데몬이 힘없이 그렇습니까, 대답했다. 검은 마법사는 다시 그릇을 향해 고개를 숙인 데몬에게 변명하듯 덧붙였다.

 “본래도 동맹에 비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으니까. 출정 횟수가 늘어난 것을 즐기는 이도 몇 있다.”

 아아. 데몬이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그너스와 쌍둥이. …아카이럼, 그도 살아있었다면 공을 세울 기회가 늘었다 좋아했겠군요.”
 “…그럴지도.”

 데몬의 입에서 나온 아카이럼은 생각 외로 담백했다. 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검은 마법사 쪽이었다. 난도질의 현장을 생각했을 때 가급적 언급조차 피하는 것이 당연한 화제였다. 데몬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우유죽을 떴다. 구겨진 환자복과 대조되는 우아한 귀족의 예법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몸을 움직이는 데 제약이 줄어서인지 전날보다 말끔한 차림새이기도 했다.
 다섯 마디를 겨우 넘긴 짧은 대담을 끝으로 데몬은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우유죽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그릇 끝에서부터 표면이 조금씩 굳었다. 검은 마법사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숟가락을 들고 있는 데몬의 손목을 잡고 무심하게 말했다.

 “눈 감아.”

 데몬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눈꺼풀을 내렸다. 곧 눈을 감으라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얼굴 앞으로 열기가 끼쳤다. 감은 눈으로도 붉은 빛무리가 보였다. 다시 눈을 뜨자 보라색 조각으로 깜빡이는 빛잔상 뒤에 김이 오르는 우유죽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혀가 데일만큼 뜨거워진 죽을 뜨며 데몬은 감사 인사를 했다. 뭉쳐 있던 죽 표면이 수저로 조금 저어주자 뭉근하게 풀어졌다.
속도는 느렸지만 음식의 높이는 착실하게 낮아졌다. 전날 데몬이 못 먹겠다며 애원한 것 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힘든 기색은 없었지만 데몬은 워낙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데 익숙했다. 검은 마법사는 버거우면 그만 먹어도 된다 말했다. 하지만 괜찮다 말한 데몬은 잠시 뒤에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하얗게 바닥을 드러낸 그릇이 보기 좋게 반들거렸다. 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식사를 마쳤으니 이전처럼 손을 묶을 것이라 예상한 데몬이 양 손을 모아 내밀었다.

 “…아아.”

 검은 마법사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말끔하게 정돈되었다. 희미한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내일 또 보자.”

 데몬은 대답 없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의 몸 어디에도 묶인 곳은 없었다. 그 눈동자에 전보다 흐린 기운이 사라진 것에 만족하며 검은 마법사는 방을 나섰다.





 ‘마스테리아는 당신의 이상을 따르고 싶어 합니다.’

 옥좌에 앉은 검은 마법사는 무심하게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그마한 머리는 높은 계단 아래 유난히 더 높이가 낮았다. 긴장한 작은 손이 등 뒤에서 꼬물거렸다.

 ‘어리군.’

 겨우 앳된 기가 빠진 동그란 얼굴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의미인가 망설이는 것도, 잠시 뒤 나이가 어려 얕보였다 생각했는지 눈에 힘을 주고 나름 무섭게 표정을 굳히는 것 까지 선명하게 눈동자에 박혔다.
 제법 기분 좋게 웃었던 것 같다. 당황해 입이 세모지게 벌어진 어린 소년의 모습이 겹쳐졌다.



 “오셨습니까.”

 검은 마법사는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은 데몬이 머뭇거리다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해쓱해진 뺨이 조금이나마 부풀어 올랐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데몬이 다가와 좁혔다. 한 걸음, 두 걸음. 찬 두 손이 검은 마법사의 손을 잡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환자복 차림인 그간과 달리 약식이나마 정갈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데몬은 가슴 쪽으로 검은 마법사의 손을 당겼다. 가까이서 보니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머리카락 곳곳이 물기로 젖어있었다.

 “오늘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마른 꽃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물결이 바람을 불러왔다. 먹구름에 가려 달이 뜨지 않는 밤이었다.

 2인분의 식사가 차려진 식탁 째로 침실로 옮겨져 왔다. 데몬은 묽은 음식을 먹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식사하는 초월자에게도 죽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식사의 의지를 보인 데몬의 앞에는 전보다 걸쭉해지고 큰 덩어리 재료가 섞인 스프가, 검은 마법사의 앞에는 초월자의 지위에 맞는 다소 화려한 식단이 차려졌다. 두 사람의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한 상에 미리 모두 올려두어 데몬의 스프 그릇 바로 앞에까지 다양한 접시가 놓였다.

 데몬의 돌발 행동은 함께 식사를 제안한 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거 먹어도 됩니까?”

 스프를 뜨던 숟가락이 커다란 샐러드 볼을 가리켰다. 모든 음식은 접시에 담았을 때의 미관을 고려해 1인분이라기엔 양이 많았고, 수면과 식사가 무의미한 초월자는 손대지 않은 음식이 더 많았다.

 “상관은 없다만,”

 먹어도 괜찮겠냐는 질문이 생략된 말이었다. 전날까지 식사를 할 때 토할 통을 따로 준비했던 이의 몸 상태 대한 걱정에서 나온 망설임이었다.

 “먹고 싶어 먹는 것이니 괜찮습니다. 마족의 회복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검은 마법사는 자신 몫의 빈 접시에 손수 샐러드를 담아 내밀었다. 레몬 드레싱을 뿌린 양상추와 생 연어, 토마토가 소담하게 쌓였다.

 “감사합니다.”

 먹고 싶다는 말에 바로 음식을 내어주긴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지 그는 데몬에게 떨떠름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앞에서 데몬은 보란 듯이 양상추와 연어를 집어 아삭아삭 씹어 넘겼다. 소화가 잘 될 만한 재료가 아닌데도 데몬은 속이 불편한 기색 없이 금세 한 접시를 비웠다. 오히려 입맛이 도는지 볼에 소스까지 묻혀 가며 열렬히 먹은 흔적이 보였다. 데몬은 입을 오물거리며 한 마디를 덧붙여 그의 걱정을 완전히 덜었다.

 “맛있네요.”

 검은 마법사는 다른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데몬의 앞으로 밀었다. 너 다 먹으라는 의사가 말하지 않아도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데몬은 사양하지 않고 포크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광대뼈 아래 가죽만 붙어 있는 줄 알았던 볼이 오랜만에 두툼하게 차오른 모습은 가장 ‘군단장 데몬’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법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턱을 괸 손으로 비스듬하게 가린 검은 마법사의 입가가 간간히 작게 움직였다.
 한창 식사를 이어가던 데몬이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는지 아, 소리를 냈다.

 “먼저 드려야 할 말씀이 있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군 일정에 차질을 드려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괜찮다는 말의 투박한 표현이었다. 의미를 곡해하지 않은 데몬이 보조개가 패인 채로 입안에 감자 조각을 잘라 넣었다. 입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제가 출정하기로 했던 사막 남단의 전투는 힐라 님께 맡기는 걸 추천 드립니다. 오벨리스크와 환경이 비슷하기도 하고, 수로 밀어붙일 수 있는 지리가 가장 유리한 건 소환수를 쓰는 힐라 님이시니까요.”

 검은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단을 낸 데몬은 당분간 복귀가 불가능할 터다.

 “중앙 숲의 대치는 마무리 되었습니까? 드래곤 마스터가 가세했다 들었습니다.”
 “에우렐과 가까운 곳이라 엘프 왕의 군대가 증원되었다. 시간이 걸리게 되겠지. 이쪽에서는 주요 거점이 아니니 물러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
 “아닙니다. 장기전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으음……, 생각에 빠졌을 때의 버릇인지 포크 끝이 아랫입술을 꾹 눌렸다.

 “거대한 드래곤을 인간의 손을 탄 숲에 오래 둘 수 없으니 전투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되면 드래곤 마스터는 자리를 비워야 할 겁니다. 메르세데스는 보기보다 도발에 약합니다. 드래곤 마스터가 부재할 때 은밀하게 병력을 충원해 그녀를 유인하고 기습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르카 님이 역할로는 적절할 겁니다.”

 전투원으로 이름이 높지만 사령관으로써도 두루 인정받았던 그의 의견엔 딱히 군더더기가 없었다. 검은 마법사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또……. 포크가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음식 위를 열심히 움직이던 포크가 멈추고 다람쥐 같이 부풀었던 볼이 도로 들어간 것은 제법 서운한 장면이었다.

 “지금쯤 제 소식이 마스테리아에 넘어갔을 테니 조만간 새 지도자를 뽑겠다는 소요가 있을 겁니다. 제 선례가 있으니 보수 세력에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부재는 크지만, 나의 군은 그 때문에 무너질 만큼 나약하지 않다.”

 검은 마법사가 입술을 빨갛게 찌르던 포크를 잡아 내렸다.

 그러니 군에 대한 걱정보다는 하루 빨리 회복해 복귀할 생각을 하도록.”
 “…….”

 데몬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죠. 다행입니다.”

 다시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검은 마법사는 진작 식기를 내려놓았으니, 데몬이 디저트까지 싹 해치우고 배부르다는 말을 끝으로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밖에 테이블을 치우라는 명령을 전한 검은 마법사도 방을 나서려 했다. 그 때 데몬이 방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마법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 잠시만…….”
 “왜 그러지?”

 데몬이 어색한 웃음을 올리며 뜸을 들였다. 검은 마법사의 손을 붙잡은 양 손이 머뭇머뭇 움직였다.
 테이블이 문 사이를 나가고 다시 문 닫힌 방안에 둘만 남자 데몬은 검은 마법사의 손을 끌었다. 검은 마법사가 순순히 움직여 주어 도착한 곳은 그가 며칠을 누워 있던 침대였다.

 “안으셔도 됩니다. 아니,”

 데몬이 상체를 들어 검은 마법사에게 입을 맞췄다. 쪽, 젖은 소리가 지나갔다.

 “안아주십시오.”
 “진심인가?”
 “네. 당신께 안기고 싶습니다.”

 옷고름을 잡힌 신부같은 수줍음이 볼에 맴돌았다. 데몬이 웃으며 스스로의 옷을 벗어나갔다. 손이 지나간 자리의 단추가 툭 툭 풀리고 맨살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서로를 마주봤다. 그새 하의까지 연 데몬은 벌써 반쯤 벗은 채였다. 데몬은 검은 마법사의 어깨를 안고 과감하게 다가왔지만 유혹이랍시고 하는 동작은 쪼는 입맞춤뿐이었다. 검은 마법사가 데몬의 허리를 당겨 눕혔다.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끌러 내려졌다.

 “입 벌리렴.”

 방 안의 불이 꺼졌다. 미숙한 입맞춤의 소리보다 질척한 소리가 맞붙은 입술 사이에서 들렸다. 평소 금욕적인 모습과 어울리게도 데몬의 키스 실력은 엉망이었다. 검은 마법사의 혀가 움직이는 대로 주저하며 간신히 따라붙을 뿐이었다. 대신 데몬은 두 팔로 검은 마법사를 꽉 안았다. 투박한 호응은 그것으로도 충분할 만큼 벅찼다. 짙은 입맞춤의 끝에 밭은 숨을 내쉬는 데몬을 위해 검은 마법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사람 사이 이어진 은사가 날카로운 칼로 그은 듯 툭 끊어졌다.

 어둠속에서 데몬과 눈이 마주친 검은 마법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이채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손목을 그은 첫날과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흐린 눈이 그를, 그와 자신 사이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목 안에서 막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 끝이 경련했다.

 “…왜, 내게 안기겠다한 거지?”

 흐린 눈이 어둠속에 흩어졌다.

 “청이 있습니다.”
 “어떤?”

 검은 마법사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데몬이 나직이 한숨을 쉴 정도의 틈 뒤에 물음에 답했다.

 “죽고 싶습니다.”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까까지의 일이 꿈이었나 생각될 정도로 모래를 뱉듯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그만 제 숨을 놓아주십시오.”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나무로 된 침대 헤드 부분이 잘려나가 벽에 부딪혔다. 데몬의 머리 바로 옆에서도 소리가 났다. 귀 바로 옆에 내리쳐진 주먹에도 데몬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가족, 가족! 그 머릿속엔 가족밖에 없는 거냐!”

 손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침대 위를 쳤다. 끝끝내 데몬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지는 못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이해하지만, 이미 집은 불탔고 그대는 살아있다. 그대의 목숨을 버리며 그들을 따라갈 필요는 없어. 그대의 가족이 그대가 뒤를 이어 죽기를 바랄 것 같나?”
 “살아있는 일 분 일 초가 후회와 죄책뿐입니다. 왜 그날 리프레가 아니었을까, 왜 아카이럼이 도를 넘은 도발을 했을 때 진작 죽이지 않았을까, ……왜, 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군단장이 되는 것을 선택했을까.”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얼어붙은 공기가 팽팽하게 가라앉았다.

 “삶의 모든 순간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 괴롭습니다. 가족의 뒤를 따르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어떻게 하셔도 좋습니다. 제발,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마른 다리가 좌우로 벌어졌다.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이들이 손님을 부르듯, 검은 마법사의 손을 붙잡고 제 다리 사이로 몸을 당겼다. 살이 빠져 도드라진 뼈가 보이는 몸 위에 로브 자락이 흘러내렸다. 살얼음판의 끝에서 금이 조금씩 가기 시작했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흰 무릎에 힘없이 손바닥이 닿았다. 무너지는 듯한 웃음이 나왔다.

 “…아니까, 너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부탁을 하는 거겠지. 나의 군단장은 현명하니까.”

 참 잔인하구나.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베갯머리 송사였다. 다리를 벌리는 이가 아닌 그를 안는 이의 마음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빛을 잃은 눈이 조용히 감겼다.
 검은 마법사가 데몬의 어깨를 붙잡아 몸을 거칠게 뒤집었다. 서로의 얼굴이 이불 속으로, 등 뒤로 감춰졌다.

 “화대로 가장 총애하던 군단장의 목숨 값을 불렀으니, 제대로 대가를 치러 보거라.”
 “…….”

 데몬은 말없이 무릎을 세웠다. 공중을 어색하게 맴돌던 손이 머뭇거리며 스스로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유일하게 살집이 남아 있는 곳을 잡은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하…….”

 이렇게까지 해서……, 검은 마법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데몬은 가장 수치스러운 자세로 치부를 드러내며 죽음을 구걸했다. 아니, 저를 마음에 둔 이에게 마지못해 동냥처럼 던져 주는 자비였다. 그가 놓은 목숨줄을 구차하게 붙잡고 있는 것도, 마음 한 조각을 애원하는 것도 검은 마법사였다. 그는 데몬의 앞에서만은 한없이 나약했고, 비참했다.

 흰 등 뒤로 그림자가 졌다. 목과 등 사이 연결부에 이가 깊이 박혔다. 검은 마법사의 손이 흰 허리를 훑고 가슴을 타고 올라와 몸을 감쌌다. 목덜미에서 입을 뗀 검은 마법사의 입술이 붉게 번들거렸다. 선명한 잇자국에 고인 피가 도드라진 뼈를 타고 느리게 흘렀다. 피가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마법사의 입이 닿았다. 울혈의 길이 생길 때 마다 데몬의 흰 등이 움찔였다.
 마른 손이 뻑뻑하게 아래를 열자 몸이 크게 떨리며 뒤를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작게 접어놓은 날개가 파드득 경련했다. 미숙한 유혹에서도 엿보였지만, 경험이 적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 머릿속엔, 티끌만한 마음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는 거냐.”

 투둑, 살이 찢어지는 소리는 실이 끊어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데몬은 시트를 물며 고개를 더 침구 안으로 깊숙이 숨겼다.





 지저분해진 시트가 펄럭 날아올라 울긋불긋한 몸을 덮었다.
 검은 마법사를 등지고 돌아누운 마른 등은 피부병이 걸린 사람처럼 성한 피부색인 부분이 거의 없었다. 입술이 원래 모양을 찾기 힘들 만큼 엉망이었다. 정사가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견딘 흔적이었다.
 풀어지지 않은 채 몇 번이고 검은 마법사를 받은 밑은 상처가 나다 못해 주름 사이가 찢어져 너덜너덜했고 안은 퉁퉁 부었다. 몇 번인지 모를 삽입이 부은 내벽을 잔인하게 갈랐다. 검은 마법사의 이에 짓씹힌 곳 보다 출혈이 가장 심한 곳은 아래였다. 정상적인 몸이었어도 버거웠을 폭력적인 성교였다. 영양실조와 부상 상태의 환자를 위한 배려는 조금도 없었다. 계속되는 아픔에 통각의 역치가 높아져도 고통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목덜미, 어깨, 허벅지, 손목, 그리고 밀부까지. 거칠게 잇자국이 난 곳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시트 위에 붉은 자욱을 그렸다.
 검은 마법사가 그를 두고 나가려는 때, 힘없이 기울어진 얼굴 위로 두 줄 길이 났다. 엎드린 채 얼마나 소리죽여 울었는지 눈가가 온통 짓물렀다.

 ‘가장 고귀하신 분께서, 왜 제가 드릴 수 없는 하찮은 것을 바라십니까…….’

 데몬이 시든 상사화처럼 울며 말했다.

 밤새 새하얗게 눈이 내렸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밝은 아침이었다.


.

.

.




 열꽃이 피듯 온 몸을 뒤덮은 감정은 불행히도 전염병이 아니었다. 가장 옮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혼자만의 병이었다.

 검은 마법사는 홀린 듯 성채 밖으로 나왔다. 밤사이 눈을 불어온 바람은 차가웠다. 얇게 간신히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찍혔다. 눈이 그쳤으니 쌓인 눈은 금세 녹아내리고 제가 새긴 자욱 역시 하얗게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가는 눈은 제 위에 찍힌 발자국을 기억하지 못한다. 제가 품은 것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물의 기억은 얄팍했다.
 왜 줄 수 없는 것을 바라는가. 충성을 다하고, 몸을 내 주면서도 단 하나만은 검은 마법사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문 나무 끝의 작은 열매처럼 그를 더 갈증에 허덕이게 했다.

 그는 가시밭길이었고, 자신은 만용에 찬 모험가였다.
 어리석은 이는 마침내 피투성이가 된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 순간을 잃어버렸다. 온 몸이 넝마가 되도록 황홀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데몬, 검은 마법사는 텅 비어버린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작은 호기심이었고, 부슬비가 굵은 눈발로 변하는 줄도 모르고 흠뻑 젖어갔다. 누적된 시간이 쌓아올린 마음은 한계를 모르고 높아져만 갔다. 꽃비를 맞는 것보다 매서운 눈보라에 생채기가 나는 것이 더 익숙한 가련한 마음이었다.

 성채를 가로지르는 햇빛이 쌓인 눈 위로 부서져 내린다. 검은 마법사는 쌓인 눈에 반사된 시린 빛을 피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먼 성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에 검은 성벽 사이, 붉은 잔상이 비쳤다.
 검은 마법사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햇살이 만든 환상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시간이 멈춘 듯 굳어졌다.

 바람 너머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창가에 위태롭게 서있는 데몬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의 흰 발끝 아래 성벽이 까마득하게 이어졌다. 창틀 아래 아침 햇살이 만들어낸 새카만 그림자가 죽음으로 향하는 길처럼 드리웠다.

 “아, 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검은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데몬이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성벽 근처의 검은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데몬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전에 그가 버린 빛을 부숴 조각한 듯, 쳐다볼 수조차 없이 눈부신 얼굴이었다. 검은 마법사의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머리가 인지하기 전, 몸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안 돼, 제발……!”

 그의 몸이 점점 앞으로 내밀어졌다. 서서히 허공으로 다가온 데몬의 몸이 지탱할 곳을 잃고 추락했다.
 빛이 산란했다. 서서히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린다.
 데몬이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검은 마법사는 지독한 낙하감을 느꼈다.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푸드득―

 빛의 잔해가 내리는 하늘을 검은 날개가 뒤덮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시간이 지나갔다. 날개를 펼쳐 검은 마법사의 앞으로 날아온 데몬이 그의 양 얼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무너지듯 품안을 파고들었다.

 “아직은.”

 품안의 데몬의 심장이 뛰었다. 하얗게 갈라진 틈새로 핏자국이 남은 입술이 움직인다. 검은 마법사는 떨리는 손으로 데몬의 등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마른 허리가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당신의 이상을 이루는 순간까지는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군사력으로써든,”

 맨몸 위에 걸친 것이 고작인 가운 사이로 전날 밤의 흔적이 보였다. 울혈과 피멍, 손자국으로 가득한 몸이었다. 데몬이 제 몸을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당신께서 원하는 어떤 형태로든.”

 흘러내린 옷 틈으로 보인 몸은 처참했다. 정사와 구타의 중간쯤으로 보일 흔적들이었다. 데몬의 몸 어느 한 곳도 검은 마법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토록 집요하고 긴 밤이었다. 입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멍 자국이 없는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이후엔?”
 “…….”

 검은 마법사가 짜내듯 물었다. 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내게서 너를 빼앗을 것이냐.”

 데몬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검은 마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냉철한 초월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갖은 감정이 수없이 묻어있는 간절한 얼굴로 외쳤다.

 “내가, 이 세계의 초월자가, 나를 조금만 보아 달라 애원하고 있다.”
 “…….”
 “제발 한 번만 돌아봐 달라고, 그 마음속에 작은 틈이라도 내어 달라고! ……한낱 마족 따위가…….”

 처절한 괴로움을 담은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악에 받쳐 내뱉는 와중에도 그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데몬은 단 한 순간도 그의 안에서 한낱 마족인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데몬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검은 마법사가 품에 데몬을 안은 채로 무너졌다. 머뭇거리던 데몬이 그의 등을 천천히 도닥였다. 검은 마법사가 하얗게 색이 바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가시밭길의 토닥임은 채찍질일 뿐이었다. 온 몸에 생채기가 났다.
 그럼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천대받는 혼혈 마족의 앙상하게 마른 손이 초월자의 심장을 날카롭게 긁어냈다.

 무정하고, 야속하고, 또,

 “…무례한 나의 군단장.”



.

.

.



 시간은 빠르고 공허하게 흘러갔다. 웃는 날보다는 우는 날이 더 많았다. 타들어가는 종이 끝처럼 까맣게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가시밭길 위로 아물 새 없이 덧난 상처가 얼룩졌다.
 사랑한 자리는 폐허였다.


 데몬은 풀 한포기 조차 남지 않은 황량한 장소에서 눈을 떴다. 어머니와 데미안, 가족이 기다리는 집이 새까맣게 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면 가장 먼저 몸에서 힘이 풀린다는 것을 데몬은 처음 알았다. 잿더미 앞에 털썩 주저앉은 데몬은 곧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머릿속이 칼끝으로 긁어내는 것처럼 아파왔다. 조각나있는 기억이 엉성하게 접합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 밤, 군단장 회의에서 다급하게 리프레로 돌아왔다. 집이 불타오르고 가족들이 불길 속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검은, 마법사……!”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한 총명한 군단장의 눈에, 이미 수 년 전에 불타 잿가루도 다 바스라진 집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마법사는 가쁜 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기억 조작이라는 큰 마법을 쓴 직후라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초월자의 오른팔이자 가장 총애 받는 군단장의 배신 소식은 대대적인 혼란을 불러왔다. 본래도 충성심이 강했지만 가족을 잃은 뒤 몇 년간 그는 그야말로 검은 마법사의 개라고 할 만한 행보를 보였다. 몸을 아끼지 않고 전쟁터에 나갔고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의 몸에 붕대가 감겨 있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고, 언젠가 한 번은 피투성이로 돌아온 그에게 위대하신 그 분마저 평소의 차가운 목소리를 버리고 그만하라 외친 적도 있었다.
 그런 데몬이 검은 마법사를 등졌다는 것은 실제로 그가 아군을 베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아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 것은 검은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는 신전 가장 깊은 곳에 급히 소식이 전해졌다. 가장 각별히 여기던 이의 배신에 분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검은 마법사는 보고를 듣고 허탈하게 웃었다. 눈살이 조금 찌푸려진 채였지만 선명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괴로움과 환희가 공존하는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수 년에 걸친 노력은 쓰게 실패했지만,

 곧 문밖이 소란스러워지고 그가 꿈에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며 그를 맞이했다. 데몬이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들어섰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몇 년간 흐린 표정만 보여 주던 얼굴에 모처럼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자신을 향한 증오일지라도, 검은 마법사는 제법 기껍게 받아들였다. 소리치며 외치는 것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그렇게 사소한 것이 벅찰 만큼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초월자의 마법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삶의 의지가 되어줄 수는 없었지만, 그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라면 가능했다. 데몬은 아카이럼에게 그러했듯, 결코 가족의 원수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복수를 하려 할 것이고, 그것은 데몬에게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다.

 무기를 든 데몬이 도약했다. 검은 마법사가 사슬을 조작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하지만 부러 치명상을 비껴갈 상처만 내려 하는데다 마력이 온전하지 않은 공격은 데몬이 쉽게 회피했다. 곧 그의 직전까지 날아온 데몬이 무기를 높게 그었다. 검은 마법사에게 공격을 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무거운 포스가 보호막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희미하게 금이 간 막을 보고 검은 마법사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공격이었다. 사슬을 맞고 튕겨 나간 데몬이 다시 같은 힘을 장전해 달려들었다. 데몬의 머리를 향해 사슬이 다가왔다. 그가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여지를 준 속도였다. 그러나 그는 피하는 대신 옥좌 쪽으로 달려들어 보호막에 무기를 다시 한 번 부딪치는 것을 선택했다. 이마를 타고 피가 흘렀지만 데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은 마법사가 떨리는 손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깊은 살기로 가득한 눈과 마주친 검은 마법사가 한숨처럼 웃었다.

 “대단하구나.”

 작은 목소리는 데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후드 속에 숨겨진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가는 것도 데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력에 삼켜져 각성할 때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자신의 이상을 이루는 날 데몬은 또 목숨을 끊을 것이고, 이상을 포기한다 해서 그가 제 곁에 머물러 주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길이 막힌 그의 최후의 선택지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짧은 공방 끝에 큰 공격을 여러 차례 한 데몬의 포스가 바닥을 보였다. 마지막 힘을 짜낸 공격 역시 보호막에 무참히 깨졌다.
 검은 사슬이 데몬을 사방에서 둘러쌌다. 후드 속에 감춰진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는 네 가족에겐 한없이 다정했지만 나에게만은 더욱 매정했으니,

 “안녕.”

 이대로 영원히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앞으로 뻗어진 손이 쥐어졌다. 여러 갈래의 사슬이 데몬을 무참히 옭아맸다. 칭칭 감긴 사슬 사이로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사슬이 거둬지자 온 몸이 넝마가 되어 정신을 잃은 데몬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혹시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데몬이 조작된 기억에 의심을 가질까 참아낸 설움이 물밀 듯 몰려왔다. 검은 마법사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얄팍한 군신관계라는 이름이나마 간신히 유지하던 관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가시밭길 위로 마침내 모든 것을 잃은 모험가가 무릎을 꿇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고통이 온 몸을 잠식했다. 소리쳐 울고 싶을 만큼 아팠다.

 서러운 후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동맹의 영웅들이 도착한 소리가 들렸다. 검은 마법사는 피투성이의 가련한 연인을 안아들었다. 가장 높은 옥좌로 향하는 걸음마다 후회로조차 남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이 바스러졌다. 옥좌 뒤에 데몬을 내려놓기 전, 검은 마법사는 마지막으로 힘없이 늘어진 몸을 당겨 안았다. 야속한 도닥임조차 없는 최후의 인사였다.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무례한,
 나의 군단장.

 “살아라.”

 날 위해, 날 죽이기 위해 살거라.
 너의 삶을 연명한 대가로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 살겠다. 가장 사랑하는 이의 칼끝에 설 것이며 너의 살의가 향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그를 찾으며 그 시간을 돌려 달라 애걸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선택의 순간이 온다 해도 그의 삶을 붙잡아 둔 이 길을 반복할 것이다. 조각난 심장은 이어 붙이면 된다. 넝마가 되어도 살아만 있다면 몇 번이고 이어붙일 수 있다. 그에게는 삶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견딜 수 있는 상처였다. 아물지 않은 곳이 아프더라도.
 데몬을 이 세상에 붙잡아 두는 것으로 검은 마법사는 그를 영원히 잃었다.

 예정된 봉인의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고요한 마지막이었다.

 새하얀 시간이 고인다. 시간이 흰 모래가 되어 그를 잠식해 나갔다. 검은 마법사는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봉인의 여파로 신전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지며 응결된 수증기가 뭉쳐 떨어졌다.
 붉게 물든 가시밭길 위로 눈이 내린다. 수년을 헤매다 지쳐 쓰러진 모험가의 위로 흰 결정이 쌓여간다.
 홀로 남겨진 고독한 설원에서 그는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인생에 단 하나뿐인 찬란한 신기루를 눈에 담았다.
 다시는 닿지 못할 환상이 부서져간다. 신전이 흰 빛으로 물들어 가장 아름다운 과거를 잠식해나갔다. 얼어붙은 입술 틈으로 간신히 단어가 된 언어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저항할 수 없는 그를 완전히 가두었다. 최후의 마법을 확인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백 년 뒤 발견된 시간의 신전에는 초월자의 옥좌 뒤 단 한 곳, 마법의 여파를 피해 얼어붙지 않은 곳이 있었다.
 새하얀 설원 속에 홀로 햇살이 닿은 듯 슬프도록 평화로웠다. 이제는 녹아내려 사라진 눈발만이 흐린 기억을 간직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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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짝사랑공 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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